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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8. 18世 〉7. <부정공>규상(奎祥)配 유인원주김씨가장(孺人原州金氏家狀)
1. 문헌 목록 〉18. 18世 〉9. <부정공>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경연참찬관휘지상가장(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經筵參贊官諱贄祥家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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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정공>청재공휘하상가장(淸齋公諱河祥家狀)
淸齋公諱河祥家狀 詩云永言配命自求多福盖福自求由命之言配如欲驗其命之有配則必先從其福之自多也所以推吾府君之配命焉府君在幼食貧恒切傷哉之歎以勳攻學問爲門戶之計專責於伯兄以勤業耕稼供菽水之養與弟並竭力採樵茅綯以給供具便身之資弟兄所食則時多木實替飯而執役猶勤不倦鄕里奇其忍飢耐寒操履堅若擬以頗立産業將厚家祚矣年當十九之癸酉九月二十六日遭外艱叩地叫天皇皇望望如有所從幾不欲生五月十二日伯兄又卒哀臨不撤撫柩長慟曰未滿二週年父母俱見背兄又棄弟而無子家禍何以至此一遵禮經而善終前後喪考妣塋兆異卜而得吉葬兄亦於妣塋下若此喪事之荐酷人所難堪猶自盡乎哀體處之坦然君子以爲難二十四歲有室治産多內助考妣忌辰用兄亡弟及之古禮必夫婦親之自前三日誠齋戒必致如在粢監躬幹豐蠲正衣冠端坐莅其將事哀如袒括涕泣若決盖痛其早年桂玉難繼未盡養親之道也自玆以往益篤怡怡於季公制産稍優爲置田庄使至兒孫勤力其中可饒衣食而季公之産尤潤焉府君生四男二女業士農敎織紝季公一男二女早事公車業欲求榮養以副親庭之望女亦善歸府君四十八歲喪室悼亡之懷無缺情禮及子女喪期之盡族戚之高年者爲勸一女氏俾慰衰年孤瑀府君慮其終有難安於家庭終不肯從此亦正家之一道也畢嫁季女而還語家衆曰哀此失母之季女今焉資裝則此情落莫實不下於喪耦之日涕不自禁家人莫不勤涕而奉慰也及其耆艾之年府君無恙季公康健食無甘若兄必共之衣有燠寒弟須問之雖謂後康剛似非過語夜視諸初年升斗葛裘之難計則以爲何如哉敎子若侄孫必勵義方畜書籍擇師友資其講學習禮之孜孜無怠也於是信乎府君之孝友率其天性勤儉立其家道尙論巳定湖南誌至述其行義矣府君諱河祥字天一號淸齋姓趙氏籍玉川其先自出高麗檢校門下侍中諱璋子供珪版圖判書孫佺三重大匡輔國光祿大夫玉川府院君至忠獻公元吉副正公瑜協志於圃冶共靖王室俱爲勝國忠臣副正子斯文入本朝左軍司正以孫府尹公琛貴 贈吏曹參議生諱智崑成宗朝筮仕宰井邑有治績著輿地勝覽四昆李式相好至今謙川上有亭雲齋崔永祚撰墓銘曾孫大承學以優仕資益於白休庵金甑山兩賢 明廟朝監泰仁施以八條之敎政明人和終至百姓相和而歌歌見於滄上李商永所撰碣銘諱珏訓練院奉事孝以見稱寔七世以上也曰維春曰光耘曰重命高曾祖三世也皇考諱廷仁妣淳昌薛氏世蔓女文良公恭儉后 正宗十九年乙卯四月二十二日府君生備嘗辛若庸玉以成孝悌慈良廉淸明白是成立之基本持養之終始也 哲宗六年乙卯十一月十一日即冬至也行茶禮嗣孫乃生府君喜形于色擧家稱慶自是之後寢食捐節因臥於床子與婦百方禱藥無奈天年之有定遂成沉痼至二十一日命豕婦襁乳孫而來提抱于膝曰奉祀有托無復餘恨矣以是日考終享年六十一墓皷岩洞中岡本生曾祖考塋下壬坐配順興安氏孝采女文成公裕后生後府君八年壬戌二月五日卒先府君十四年壬寅五月十七日壽四十一墓在府君塋右局丑坐生四男二女長永燦娶錦城鄭氏邦佑次永振壽階通政娶慶州金氏龍浩女次永寶娶光山金氏道源女季永喜娶錦城鄭氏致榮女長適原州金鳳汶季適光山盧永鎭長房二男三女承根監察鍾根錦城羅鳳煥妻原州金洪妻耽津崔 柱妻二房六男滿根都事東根在根壽根昌根洪根三房三男一女尙根文根演根文學孝友著名光山金箕冕妻四房二男一女奎根聖根木川張台烈妻外孫金俊英盧泰洪曾孫炳瓓炳華豐川盧龜鉉妻承根二男一女炳寅冠山任直鉉妻木川張基周妻鍾根一男二女羅漢隼羅鳳煥男金大英金洪男崔萬興崔 柱系男炳寬滿根男炳賢炳烈炳禧德水張赫鎭妻東根三男一女炳表竹山安圭伯妻在根一男一女炳元宜寧南元熙妻陽川許相妻壽根一男二女炳學炳贊光山金箕南妻慶州鄭赫朝妻濟州梁敬承妻星山李在煥妻昌琴二男四女炳學出爲洪根系男炳流炳浚尙根二男文根無育炳哲演根男金士一金箕冕系男炳秀延安李忠寧妻全州崔瓛奎妻奎根一男二女炳佑炳稷炳詢炳訓炳 原州金在浩妻聖根五男一女張周瀅張基燮張周鉉張周學張台烈四男餘不盡錄嗚呼府君履曆如彼後祿如此若使詩人復作則豈不云配命求福乎誠不可以溢美而誣先功不可以漏傳而忘先一日趍庭命不肖曰維我祖考之令德茂行敬承父兄之咡詔者惟吾一人在年近八十亦朝暮人也窃恐及今無述將後無傳顧念先妣之訓迨余呱呱之日祖考偶有不安節未得復饍及至臨命襁余臥膝遺囑以承廟繼家其蒙恩愛之重固非餘孫之可比而余乃今日得享孫曾之供歎於偕床豈非祖若蔭佑攸届耶厥初在抱承十日顔俯仰今昔感愴曷極敬受庭訓而退歷叙其立心制事之篤力淸苦家世源之母恭不墜天翁有知而厥報不食俾作立言家采之資本焉 曾孫 炳瓓 謹狀 청재공휘하상가장(淸齋公諱河祥家狀) 「시경(詩經)」에 『길이 하늘의 뜻을 받들어 행하여 스스로 자신의 복(福)을 구하라』 하였으니, 덕(德)을 닦으면 유지되고 덕을 잃으면 지탱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 부군(府君)께서 하늘 뜻을 받들어 행한 것을 미루어 알겠도다. 부군이 어려서 집이 가난하여 항상 부모를 봉양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여 공부를 부지런히 하여 문호를 빛낼 것은 큰형에게 책임지우고 부지런히 갈고 거두어서 부모를 봉양할 것은 동생과 함께 힘을 다하기로 약속하고 나무를 하고 띠풀을 베어 도롱이를 만들어 팔고 산업을 힘쓰니 집안 살림이 점점 풍성하였다. 계유년 九월 二十六일 나이 十九세때에 부친상을 당하여 평소에 가난하여 부모 봉양 못한 것을 하늘에 사무친 슬픔으로 알아 울음을 그치지 않고 최복을 벗지 아니하였다. 을해년 三월 二十일에 거듭 모친상을 만나 땅을 치고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여 그 슬픔이 극도에 달하였다. 五월 十二일에는 또 큰형이 별세하니 관(棺)을 얼싸안고 통곡하여 말하기를, 『二년 미만에 부모가 함께 돌아가시고 형이 또 아우를 버리고 갔는데 아들이 없으니 가정에 불행이 어찌 이다지 삼한가.』 한결같이 예경에 따라 착실히 상을 마쳤다. 고비(考妣)의 묘소는 각각 길지를 얻어서 안장하고 형 또한 비의 묘소 아래에 장사하였다. 이와 같이 상사가 거듭 혹독한 것은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인데 태연히 처리하여 가는 것은 군자로서도 하기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二十四세에 결혼하여 치산한 것은 내조의 힘이 많았고 고비(考妣) 제사에 반드시 삼일목욕재계하고 제수를 풍족하고 정결하게 숙정하여 초상 때같이 슬퍼하고 항상 곁에 모신 것같이 행사하니 이는 소시에 난하여 양친에게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이로부터 아우와 더욱 화락하고 가산이 조금 여유가 있으면 전장을 사서 아손이 근력하니 의식이 풍요하였다. 부군이 四남 二녀를 두었는데 주경야독하고 방적을 가르치며 계제 一남은 일찍 과업(科業)을 힘써 영달하여 친정의 소망을 이룰 생각이었고 둘째딸 또한 잘 출가하였다. 부군이 四十八세에 상처하여 정과 예를 다하여 송사(送死)하고 상기가 지나자 족척 간에서 재취하라 권하니 부군이 가정이 편안치 못할까 염려하여 마침내 응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를 집안을 바르게 한 도리였다. 막내딸을 시집보내고 돌아와 말하기를 슬프다 어미없이 자란 막내를 이제 우귀하여 보내니 성식이 낙락하여 실로 상배한 날보다 못하지 아니한다 하고 눈물을 스스로 금치 못하니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지 않은 자 없었다. 쇠로(衰老)한 나이에 부군이 무양하시고 아우도 간건하여 달고 쓴 것이 없어 먹는 것은 반드시 형이 함께 하고 다습고 시훤한 의복이 있으면 아우가 모름지기 물으니 비록 후강광(後康光)이라 일러도 과한 말이 아닌것 같다. 초년에 의식이 곤란한 것을 생각하면 어떻다 하겠는가. 자손을 반드시 옳은 길로 지도하며 책을 쌓고 스승을 가려 학문을 강론하고 예서를 학습하여 근근 부지런하고 열심히하게 하였으니 이에 부군의 효우(孝友)는 천성에 뿌리한 것이다. 부지런하고 검약하여 그 가도를 세운 것은 높은 의론이 이미 정하여져 호남(湖南誌)에 그 행의를 기술하였다. 부군의 휘(諱)는 하상(河祥)이요, 자는 천일(天一)이며 호는 청재(清齋) 성은 조씨요 본은 옥천(玉川)인데 그 선대는 고려 검교문하시중 휘 장(璋)으로부터 비롯하여 그 아들 홍규(供珪)는 판도판서요 손자 전(佺)은 삼중대광보국광록대부 옥천부원군이며 충헌공 원길(元吉) 부정공 유(瑜)에 이르러 포은 야은과 뜻을 합하여 함께 왕실을 도와 같이 전조 충신이 되었고, 부정공의 아들 사문(斯文)은 조선의 좌군사정으로 손자 부윤공의 영귀로 증 이조참의요, 생휘 지곤(智崑)은 성종조에 처음 출사하여 정읍현감으로 치적이 있어 「여지승람」에 나타났으며 四형제가 서로 좋아하여 지금 겸천원에 정각이 있는데 자손이 선규를 지켜 매년 九월에 강회를 열어 담락하고 있다. 증손 대승(大承)은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 증산(甑山) 金양현에게 수학하여 학문이 우수함으로 벼슬길에 올라 명종 때에 태인현감으로 八條의 가르침을 베풀어 정치가 밝으므로 사람의 마음이 화락하여 백성이 서로 화답하였다. 휘 각(珏)은 훈련원 봉사로 효행으로서 명성을 날렸으니 바로 七세이상이다. 유춘(維春)·광운(光耘)·중명(重命)은 고·증·조삼세요 황고의 휘는 정인(廷仁)이며 비(妣)는 순창설씨(淳昌薛氏) 세만(世蔓)의 따님으로 문향공(文良公) 공검(恭儉)의 후손이었다. 정종(正宗) 十九년 을묘(一七九五) 四월 二十二일에 부군이 출생하여 갖은 고생을 다하여 옥으로서 이루어 효제자량(孝悌慈良)하고 염청명백(廉清明白) 하였으니 이는 성립의 기본이요 지양(持養)의 종시였다. 철종(哲宗) 六년(一八五五) 을묘 十一월 十一일에 동지다례(冬至茶禮)를 지내고 사손(嗣孫)이 출생하니 부군이 희색이 만면하고 온 집안이 경사라 일컬었다. 이로부터 침식이 순조롭지 못하여 병상에 누우니 아들과 자부가 백방으로 빌고 약을 써도 명한이 있는지라 마침내 위독하니 손자을 불러 끌어 않으며 『제사를 받들 사람이 있으니 여한이 없다.』 하고 二十一일에 고종하니 향년이 六十一세였다. 皷岩洞 中崗의 本生曾祖考塋아래 壬坐에 안장하고 배(配)는 순흥안씨(順興安氏) 효채(孝采)의 딸로 문성공(文成公) 유(裕)의 후손인데 부군보다 八년 뒤인 임술(壬戌)년 二월五일에 출생하여 부군보다 十四년 먼저 임인(壬寅)년 五월 十七일에 수四十一세로 별세하니 묘소는 부군묘우국 축좌이다. 아들은 영찬(永燦)·영진(永振)·영보(永寶)·영희(永喜)요, 딸은 원주 김봉문(原州金鳳汶)과 광산(光山) 노영진(盧永鎭)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승근(承根) 감찰이요, 종근(鍾根) 금성 나봉환(錦城羅鳳煥) 원주 김홍(原州金洪) 탐진 최주(耽津崔柱) 처는 장방출이요, 만근(滿根)은 도사 동근(東根)·재근(在根)·수근(壽根)·창근(昌根)·홍근(洪根)은 이방출이며 상근(尙根)·문근(文根)·연근(演根)은 문학 효우로 저명하고 光山 金箕冕의 처는 삼방출이고, 규근(奎根)·성근(聖根) 목천 장태열(木川張台烈)의 처는 사방출이다. 증손 병란(炳瓓) 병화(炳華) 豊川 盧龜鉉의 처는 승근출이요 병인(炳寅) 冠山 任直鉉, 木川 張基周의 처는 종근출이며 병관(炳寬)은 만근의 남이고 병현(炳賢)·병렬(炳烈)·병희(炳禧) 德水 張赫鎭의 처는 동근출이요 병표(炳表)와 竹山 安圭伯의 처는 재근출이며 병원(炳元) 宜寧 南元熙·陽川 許相의 처는 수근출이고 병학(炳學)·병찬(炳贊)·光山 金箕南·慶州 鄭赫朝·濟州 梁敬承·星山 李在煥의 처는 창금출이요, 병학은 홍근 후사로 출계하고 병류(炳流)·병준(炳浚)은 상근출이며, 문근은 무육이고 병철(炳哲)은 연근의 남이요, 병수(炳秀)와 延安 李忠寧·全州 崔瓛奎의 처는 규근출이며 병우(炳佑)·병직(炳稷)·병순(炳詢)·병훈(炳訓)·原州 金在浩의 처는 성근출이고 나머지는 기록을 생략한다. 아! 부군의 이력이 저와 같고 후록(後祿)이 이와 같으니 만일 「시경(詩經)」을 저작한 사람이 다시 저술한다 한들 어찌 천명을 받들어 행하여 복을 구한자라 아니 하겠는가 진실로 아름다운 말로써 선조의 사행을 과장(誇張)한 것이 불가하고 전하지 못하고 선덕을 잊어 버리게 한것도 불가한 일일 것이다. 어느날 문안하니 불초에게 말씀하시되, 『생각하건대 우리 조고의 어진 덕과 장한 행의를 부형의 구전으로 들은 자가 오직 나 한사람인데 나이 八十에 또한 목숨이 조석간에 달였으니 이제 기술치 아니 하면 장차 후일에 전하지 못할까 두렵다. 선비의 가르침을 생각하니 내가 처음 울음소리를 내고 태어날 때 조고가 우연히 병환이나 회춘을 못하고 운명할 때에 강보에 쌓인 나를 무릎에 누이고 성영 향화을 유촉하시었으니 그 입은 은애(恩愛)의 무게가 다른 손자에 비할바 아니다. 이제 내가 손자와 증손의 재롱을 보고 즐거운 것이 어찌 조고의 음우(蔭佑)가 아니겠는가. 처음 안겨서 十일 승안(承顔) 한 것을 옛을 우러러 보고 지금을 굽어 볼때 감창한 마음을 어찌 다 형용 하겠는가』 하시었다. 공숙하게 정훈을 받고 물러나 그 마음을 정하고 일을 처리한 독행청고(篤行清苦)와 세덕의 근원과 흐름의 욕됨이 없이 떨어지지 않토록 서술한 것은 천옹(天翁)이 알고 불식지보(不食之報)를 준 것임으로 이에 청론을 말한 군자의 채택 자료로 제공한다. 증손(曾孫) 병란(炳瓓)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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